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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검투사와 현대 테니스 선수

기사승인 2023.11.20  10: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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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윔블던에 세워졌던 테라코타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서 남자투어 파이널이 열렸다. 세계 1위부터 8위까지 최고 테니스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초청받아 일주일간 경기를 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열릴때는 이들 선수를 무사로 보고 진시황때의 용사 복장의 동상을 세워 놓고 테니스 대회를 고대 전사들의 대결같은 분위기로 연출했다.

스위스의 페더러, 스페인의 나달, 동유럽 세르비아의 조코비치 등이 그 주요 전사였다. 

2023 투어파이널에 출전하는 전사는 다양했다. 스페인 전사 알카라스, 로마 전사 야닉 시너, 동유럽 검투사 조코비치, 그리스의 전사 치치파스, 북유럽 바이킹의 후예 덴마크의 홀거 루네 등등.

최고의 자리에는 36살 동유럽의 검투사 조코비치가 올랐다. 로마 전사 시너가 마지막 무대에서 한두번의 결정적 실수로 장렬히 전사했다.  동유럽 검투사는 최고의 방패를 지니고 로마 전사의 공격을 막아내고 틈을 타 되 찔러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고대 로마 검투사와 대회는 현대 테니스 선수와 대회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고대에 선수 양성 아카데미(훈련소)와 보상(상금과 포인트)이 있었고 선수마다 싸움 기술 수준이 달라 등급이 있었다. 등급에 따른 대회(마스터스와 투어대회, 투어 파이널)와 등급을 무시한 대회(그랜드슬램)
경기장 관중석은 층의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다른 입장권이 판매되었다. 귀족이 티켓을 사서 가난한 민중에게 나눠주기도 했다(초대권). 

대회 규모는 오늘날 테니스대회 최대 규모인 128드로로 일주일간 열리고 대회가 열리기전에 선수와 vip들을 불러놓고 웰컴 파티를 해 대회 분위기를 돋우웠다. 콜로세움으로 불리는 원형경기장은 오늘날 센터코트로 발전했다. 일본 도쿄 아리아케에 있는 센터코트 이름이 콜로세움인 것은 고대 검투사들의 원형경기장과 검투사 경기가 마치 현대 테니스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에서 명명됐다.

대회 초반 오전 경기는 낮은 랭킹의 선수들이 경기하고 관중이 몰리는 야간에는 톱 랭커들이 경기하는 일정을 짰다. 
경기도중 선수가 부상을 입으면 그것이 꾀병인지, 실제 부상인지 판단하고 기권처리했다. 
승리한 선수에게는 승리 수당이 주어지고 최종 우승자에게는 거액의 상금과 도자기 트로피를 제공했다. 도자기 트로피에는 선수의 용맹한 경기 모습이 담겨진다.   선수들은 각기 특색있는  유니폼을 장착하고 단검으로 승부를 냈다. 

아래는 고대 로마 검투사와 경기에 관한 내용이다. 테니스대회와 선수는 고대 방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테니스대회의 프로토타입은 고대 검투사들의 경기였다. 

검투사(라틴어: gladius, 글라디우스)는 고대 로마의 볼거리 중 하나로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한다.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 글라디우스를 사용해 글라디에이터로 불린다.

로마 공화정이나 로마 제국의 많은 도시에 원형경기장에서 투사끼리 싸웠다.

민중들은 투기 대회에 열광했고, 정치가에게 투기 대회를 개최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투기 대회가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해져 갔고, 대회의 개최일수와 투사의 수가 늘었다.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영토확장과 더불어 대량의 전쟁 포로를 획득했는데 포로들을 각각의 민족 전통의 장비들로 무장시켜 투사로 만들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14년)는 재위 중에 8번 투기 대회를 주최하여 1만명의 투사를 싸우게하였다.

80년, 도시 로마에는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라이우스 원형투기장(콜로세움)이 완성되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이 콜로세움의 준공식으로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는 1만명의 투사를 모아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고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년 ~ 192년)는 스스로 투사가 되어 735회나 싸웠다. 로마 세계 전체로는 186 곳 이상의 원형투기장이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86곳의 미확인 투기장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선수 양성 아카데미와 보상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 시대 이후, 도시 로마에서는 투기 대회의 개최는 관리관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그리고 “조조(早朝)양성소(Ludus Matutinus)” 4군데 제국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로마의 대양성소는 지하통로로 콜로세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회가 찰나의 유혈 사태로인한 흥분만을 추구하게 되어  관객에게 투사의 기술로 매료시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는 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단순하게 죽을지 살지를 정하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 인기를 잃어버려 소멸에 이른 원인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투사는 승리를 계속하다보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징집된 노예나 자유민들은 라니스타(lanista:투사 훈련소 소유자, 투사 관리자)가 소유한 투사단(familia gladiatorial)에 속하게 되며, 그 투사 양성소(Ludus)에서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고 투기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라니스타는 투기 대회에서 살아남아 자유를 얻은 전직 투사들로 재물을 쌓는데는 성공했다.

투사 양성소에서는 기술을 지도하는 전직 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나 교사(Ludi Magister), 고도로 숙달된 의사나 마사지사 등이 있어 투사 양성에 힘썼다.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는 투사들에게 행진하는 법에서부터 무기를 다루는 법, 발기술, 찌른 검으로 어떻게 동맥을 찾는지 등을 지도하고 철저히 훈련시켰다. 투사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으며, 짚 인형을 상대로 덤비는 연습, 훈련생끼리 연습시합 등으로 경험을 쌓아갔다. 목검으로만 훈련했던 이유는 반란의 위험을 막기 위함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함에서였다. 진검은 투기 대회 때 말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이 주어졌다.

훈련생들의 기숙사는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있었으며 밤에는 열쇠로 잠가두었다. 식사에 대해서는 영양에 좋은 식사를 제공했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보리를 먹게되면 지방이 불어나 출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보리를 주식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배려를 했다.

기초적인 훈련을 끝낸 신입 투사는 민첩함과 강함, 체격과 숙련도 등에 따라 트라케스(Thraces:트라키아인 풍의 장비를 한 전사), 삼니테(Samnite:삼니움인 풍의 장비를 한 전사), 레티아리이(Retiarius:그물투사), 무르밀로(Murmillo:생선을 본뜬 투구를 쓴 투사), 세크토르(Secutor:추격투사) 등의 다양한 스타일의 투사로 나뉘었다.

싸우는 스타일은 보통 전투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무술 대련에 가까운 것으로서 실제 검투 경기 중에는 서로 상대방의 스타일을 알고 싸울 수 있도록 같은 학교의 투사를 대련시켰다고 한다. 또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한 낙오자는 베스티아리이(Bestiarii:짐승과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투사는 자신이 속한 투사 양성소의 라니스타에 의해 각지의 투기장을 순회하며 투기 대회를 치렀다. 투사는 소모품이 아니라 순회를 시켜 돈을 벌기위한 귀중한 자산이었기에 라니스타는 투사를 빈번하게 투기 대회에 내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전투가 공정하고 관객도 즐겁게 하기 위해 신경을 써서 대전 상대를 짰다.

예전에는 투사들에 대한 인식이란, 시합이 시작되면 어느 쪽이 죽어나가야지만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반드시 죽을 때까지 싸웠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목숨을 건지는 일도 많았다. 그리하여 끝까지 무사히 살아남아 은퇴한 투사들 중에는 “라니스타”나 “도크토레”가 되어 투사를 단련시키는 일을 맡는 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살아남아 은퇴한 자들에게는 그 증거로 목검(Rudis)이 하사되었다.

선수의 등급

테니스도 아마추어, 퓨처스, 챌린저, 투어 선수 등급이 있듯이 투사에는 “도크토레(투사 트레이너 또는 검술지도자)”, “루디아리우스(Rudiarius)”, “팔루스(palus:투사의 서열)”, 그리고 시합을 경험하지 않은 “훈련생” 순으로 칭호가 있었으며, 그 중에 동일한 무장 집단의 서열을 뜻하는 팔루스는 “수석 투사(primus palus)”, “차석 투사” 순서로 이어지며, 제 3에서 많게는 제 8의 투사까지 존재가 확인되었다. 승리를 계속 따낸 투사에게는 더 나은 거주 환경이 주어졌다. 최고 위치인 수석 투사(primus palus)에까지 올라가면 최고의 주거 환경을 요구할 수 있었다. 연인을 가질 수 있었고, 가족을 영위하는 투사도 있었다. 

투사는 경기장에서 관중의 갈채를 받는 대상이며 큰 액수의 보상도 받는다.

 
   
   
 
 
 

대회와 경기장 관중석, 유료 입장권

투사 경기의 주최자의 경향이나 야심에 따라서 경기의 잔혹한 정도나 진귀한 볼거리의 정도, 그리고 흘러내릴 피의 양이 달라졌다. 그러나 적어도 투사끼리 시합을 하는 날에는 룰도 없는 잔혹한 쇼는 아니었다.

투기 대회는 황제나 정치가, 지방 명문가가 주최하였으며, 비싼 값의 표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나눠주었고(공화정 말기부터는 판매도 했다), 표를 가지지 못한 하층계급과 비(非)시민계급 사람들도 최상층의 입석에서 관전할 수 있었다. 민중은 무료로 관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는데, 기원전 122년경에는 고급 정무관이 특권을 이용해 투기장에 열람석을 설치해 유료로 시합을 보도록 했지만, 당시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민중을 위해서 직인들을 경기장으로 밀어넣어 열람석을 부숴버리고 무료로 관전할 수 있게 했다.

대회 규모, 128드로, 일주일간 대회, 웰컴 파티

투기 대회의 규모는 다양했다. 투기 대회는 총 30개 조를 짜서 3일 혹은 4일 동안 치러졌다. 120개 조를 최대 숫자로 규정하기도 하고 5000개 조를 싸우게도 했다.

투기 대회에는 이벤트의 측면도 있었기에 투기 대회 전날에는 연회가 개최되어 투사들에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들을 제공되었는데 이를 시민들이 구경했다.
투기 대회는 이른 아침부터 개최되었는데 최초에는 퍼레이드용 투구를 쓰고 자수가 수놓아진 망토를 몸에 두른 투사들의 입장식이 있었고, 주최자는 인기 몰이를 위해서 공을 들였다. 황제가 투기 대회를 주최한 경우에는 투사들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경례를 했다고 한다.

황제 만세! 죽음을 향하는 자들이 경의를 표하옵나이다
("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 또는 "Ave, Caesar, morituri te salutant")

   
 

오더 오브 플레이와 야간 하이라이트 경기

오전 중에는 맹수 사냥(Venationes)이 개최되었다. 유럽,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모아온 곰, 호랑이, 사자, 표범 동의 맹수나 코끼리, 기린 등의 진귀한 동물도 투기장에 투입되어 베스티아리이(Bestiarii:짐승과 싸우는 투사)들이 이것들을 사냥해 죽였다.

원래 맹수 사냥과 투사 시합은 각각 달리 개최되었으나 점차 투사 시합 직전에 여흥을 돋구기 위한 이벤트로 개최되었으며, 로마 제정에 들어서서는 고정 코너가 되었다. 베스티아리이는 무장을 했기에 맹수들과 싸워 목숨을 잃을 확률은 별로 높지 않았다.

오후에 이류 양성소의 투사(마리디안:정오에 싸우는 투사)의 시합으로 이들은 제비뽑기로 조를 정해 싸웠다. 여기서 신입 투사들이 첫 전투를 치루곤 했는데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저녁무렵부터 수석 투사(primus palus)를 시작으로 이름 있는 투사들의 시합이 열린다.

부상기권 처리

투사의 이름이 불리고 각자 무기의 위력을 점검한 후, 2명의 심판이 있는 검투장 중앙으로 나아간다. 시합은 상대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 무력화시키기까지 계속된다. 시합을 끝내고 싶다면 집게 손가락을 높이 올리거나 방패를 던지면 “항복”의 의사표시이다. 항복한 상대를 상처입히는 행위는 비열한 행위로 여겨졌다. 혹은 어느 정도 부상을 입은 경우 관중들이 “habet, hoc habet”(그는 당할 만큼 당했다)라고 말하면 끝내거나 심판의 판단으로 시합을 중단시켰다.

투사가 중상을 입어 싸울 수 없게 되거나 죽었을 경우, 주최자는 시장가격에 맞게 라니스타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보상비가 오늘날의 비용으로 약 10억 원 정도에 해당하였다.

   
   
 

상금과 트로피

승리자(윈키토)에게는 그 증거인 종려 나뭇가지(파르마)나 월계관(코로나)이 제공됐다. 때로는 승리 보수로 대량의 금품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시인들에게 칭송되었고, 보석이나 항아리에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것들은 로마의 부인들이 애용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 1세기에 100번의 시합이 있었고, 200인의 투사 중 19명이 사망해 생존율은 9할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투기 대회는 다시 과격해져 갔고, 3세기에는 시합 한 번마다 사망자가 나오게 되었는데, 결국 투사 시합의 패자는 대부분 살해되게 되었다.

주최자의 취향에 따라 변칙적인 투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시합은 보통 1대 1 방식이지만 칼리굴라 황제(재위 37년 ~ 41년)는 레티아리이(Retiarius:그물투사) 5인과 세크토르(Secutor:추격투사) 5인을 싸우게 했다.

은퇴

투사는 연간 3, 4회 정도 시합을 치뤘고, 20번 싸우기 전에 대부분 죽거나 목검을 수여받아 은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세기경에는 살아남을 확률은 20명 중에 1명 정도였다. 시칠리아의 세크토르(Secutor:추격투사) “프란마”의 묘비에는 4번 목검(Rudis)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싸우길 계속하여 25회 승리를 따냈으며, 4회 목숨을 구명 받았고 9번의 승부에서 무승부를 이루었다고 적혀있다. 투사를 포함 오랜 시간을 봉사한 노예는 그 공을 참작해 해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투사였던 노예의 경우에는 관객의 갈채를 받은 경험을 잊지 못하고 은퇴한 후에도 또다시 투사로 돌아오는 자도 있었다.

대회 평가

공화정 말기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투사 시합에 대해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나, 고통과 죽음에 시각적으로 익숙하게 만드는 훈련으로써 이 이상의 것은 없다”고 평했다. 제정 초기의 정치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살육만이 반복되는 투기 대회와 그것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렇게 투기 대회를 관전하는 것은 ”사람을 한층 더 비인간적으로 만든다”고 말했고, 키케로와 달리 그 이용 가치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투사 시합으로인해 ”로마인들 마음 속에 잔혹성을 심었다”고 평함과 동시에 “유혈과 부상에 익숙하게 됨”으로 인하여 로마 군단의 강함이 유지되었다고 키케로와 비슷한 해석을 하였다. 장자크 루소는 “투사 시합은 공화정 시대에 로마인의 용기와 덕을 자극했으나 제정 시대에는 유혈 사태와 잔혹함을 좋아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선수 유니폼

투사의 장비에는 복부나 급소가 노출된 디자인이 많았다. 서로 상대에게 상대를 부상을 입히지 못하면 시합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몸의 급소가 노출되어 있었으며, 또한 무거운 갑옷의 경우 투사의 움직임을 방해해 시합이 재미 없어진다는 점도 노출이 많은 이유다. 방어를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시합을 멋지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연출용, 장신구적인 의미가 강했다. 베테랑 투사는 방어할 때 노출된 부분을 방어하는데 정신을 더 집중해, 방어의 불완전한 부분을 커버했으며 이러한 책략도 시합을 더 재밌게 했다.

박원식 기자 editor@tennispeop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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