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여수 거문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가 열린 곳은 어디일까. 재미 삼아 퀴즈로 풀어보자. ①덕수궁 ②여의도 ③미창동 ④거문도
<체육학대사전> 등에 따르면 ③이 정답이다. 최초 테니스 경기는 1908년 4월18일 탁지부(오늘날 기획재정부) 관리들이 서울 미창동 코트에서 일본식 연식정구를 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33년 앞서 조선땅에서 테니스를 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 군인들, 그것도 남해 외딴 섬 거문도에서였다. 역사는 구한말 영국군이 이 섬을 2년 가까이 무단 점령했던 일을 ‘거문도사건’이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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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를 찾은 것은 공교롭게도 지난 4월15일이었다. 1885년 영국군이 섬을 점령한 지 꼭 129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관련행사가 열린 것은 아니고, 순전히 <테니스피플>을 위한 취재 목적이었다. 오전 7시40분 여수항을 떠난 쾌속선 데모크라시호는 나로도, 손죽도를 거쳐 10시쯤 거문도항에 닿았다. 이 노선은 세월호 침몰사고를 낸 청해진해운이 운항하고 있어 대형사고 바로 전날 문제의 선사 배를 탄 셈이 됐다.
여객선이 들어선 거문항은 고요한 호수와도 같다. 고도∙서도∙동도 3개 섬이 팔을 벌려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들 섬이 거칠기로 이름난 인근 해역 파고를 막아주는 천혜의 항구다. 그래서 100만평 남짓 앞바다를 삼호(三湖)라 부른다. 인구 1900명의 낙도인 거문도 탐사를 위해 미리 여수시의 협조를 얻어 삼산면사무소에 들렀다. 거문도는 부속 섬 112개(유인도 8개)를 거느린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소재지다.
작은 체구에 단정한 인상인 허민 삼산면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허 면장은 섬의 역사와 현황에 관해 설명하면서 거문도엔 ‘우리나라 최초’ 3가지가 있다고 했다. 다시 퀴즈로 맞춰보자. 다음 중 거문도에 최초로 도입된 문물이 아닌 것은? ①테니스 ②전기 ③당구 ④상수도
영국해병, 유곽 놀러 가다 익사
정답은 ④다. 나머지 세 가지는 영국군이 들여왔다. 그 중 가장 확실한 입증자료를 가진 것이 테니스다. 전기는 군함 발전기를 통해 전구를 켰던 것으로 추정되고, 당구는 문헌으로만 간단히 전해진다. 반면에 테니스는 당시 무인도였던 고도 주둔지 바닷가에 만든 코트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금 테니스코트 자리에는 만물백화점이란 가게가 들어서 있다.
영국군이 들여온 테니스는 단순히 첫 유입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유산으로 남았다. 바람이 거센 섬이지만 거문도엔 복식코트가 6면(고도 2, 덕촌중 1, 해군기지 2, 한전 1) 있고, 동호인도 50여 명에 이른다. 허 면장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대회가 면내 최대 행사였고, 이곳에 부임한 군인, 교사, 주재원들은 테니스를 배우는 게 관행”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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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담론에 이어 마을 뒷산 테니스코트와 영국군 주둔지였던 거문초등학교, 영국군 묘지를 둘러봤다. 최초 테니스 보급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산 중턱에 조성된 테니스장은 1면짜리 하드 코트였다. 해밀튼은 영국이 당시 거문도를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이라 명명한 데서 온 명칭이다. 바닥 평탄도가 수준급은 아니지만, 이 좁은 섬에, 자동차도 진입하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 세워졌음을 감안하면 그 존재 자체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두 방향에서 환상의 쪽빛 바다가 눈높이에 맞닿는다. 동행한 임석희 이레수산 대표는 “테니스 첫 보급지에서 볼을 쳐보려는 동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영국군인들이 여가시간에 즐긴 것은 테니스와 당구 만이 아니었다. 당시 한 일본인이 여성 5명을 데려와 서도에서 유곽을 운영했음이 영국해군 기록에 남아 있다. 1886년 6월18일 저녁 영국병사 12명이 두 척의 보트에 나눠 타고 이 유곽에 놀러 가다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다. 고도와 서도 사이는 약 500m 거리다. 11명은 헤엄쳐 나왔지만 해병대원 피터 와드(Peter Ward) 일병은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수영이 미숙했던 데다 주머니에 유흥비로 쓸 은화를 잔뜩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고 해군 기록은 적고 있다. 영국군은 시신을 찾은 조선인에게 사례하고, 다음날로 유곽을 폐쇄했다. 와드 일병은 영국군 묘지에 묻혀 다른 6명과 함께 묘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상은 영국해군이 작성한 의회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와 매우 유사한 구조의 ‘사랑이야기’가 구전된다. 얘기인 즉 영국 수병 한 명이 동도의 처녀무당에게 반해 동도로 헤엄쳐 건너가 양과자 같은 선물을 전달했다는 것. 그러다 발각돼 마을사람들이 처녀를 다른 섬으로 보내자 그녀가 간 섬 쪽으로 헤엄쳐 가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다. 추정컨대 위 영국해병 사건이 구전되면서 그럴 듯하게 미화된 것 아닌가 싶다.
구비구비 절경 등대 트레킹
거문도 등대. 남해안 최초,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등대다. 남해 영해기점이 되며 툭 트인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거문도 등대. 남해안 최초,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등대다. 남해 영해기점이 되며 툭 트인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거문도는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 탐낸 해상요새이자 전략요충이었던 탓에 서양문물을 본토보다 일찍 접했다. 거문도사건만 해도 러시아와 영국을 대리한 아프가니스탄 간 무력충돌 결과로 빚어진 첨예한 국제정세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그런 맥락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고,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 자체도 1달 뒤에나 알았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을 청나라와 일본에 먼저 알렸고, 이후 협상에서도 조선은 배제됐다. 거문도가 홍콩 같은 영국 조차지가 될 뻔했던 중요한 사건을 자기 땅인 조선만 몰라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문도는 수려한 풍광 곳곳에 역사의 숨결을 담고 있다. 귤은 김유 사당, 중국 다롄-일본 사세보 해저케이블 육양지점, 남해안 최초 등대, 의병장 임병찬 순국지, 일제강점기 신사터와 터널 등 군사시설, 삼산면 의사당 등 그것이다. 이 중 서도 남단 절벽 위에 세워진 거문도등대가 압권이다. 등대 가는 길은 울창한 동백숲 터널이다. 절벽 구비구비 바다가 드러나며 절경을 자아낸다. 등대는 지금도 15초마다 적∙백색 섬광을 42㎞까지 비춘다. 백도를 바라다보는 등대 앞 관백정에 오르니 탁 트인 바다가 오감을 압도한다. 여기서 마지막 퀴즈.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유인등대는? ①인천 팔미도등대 ②거문도등대 ③부산 영도등대 ④포항 호미곶등대
정답은 ①. 순서대로 각각 1903년, 1905년, 1906년, 1908년 세워졌다. 그러니까 거문도등대는 남해안 최초, 국내 두번째다. 거문도는 낚시꾼의 천국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테니스 동호인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특별한 코트에서 한 게임, 역사산책과 등대 트레킹, 싱싱한 해산물은 먼 길을 보답하고 남음이 있다.
▲ 찾아가는 길
-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거문도행 쾌속선 하루 2회 운항. 2시간 20분 소요. 문의 061-663-0116
- 고흥 녹동항에서 거문도행 여객선 하루 1회 운항. 2시간 50분 소요. 문의 061-843-2300
오룡(코멘터리 주간) roh8033@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