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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테니스 프로화 시도 1984~1993

기사승인 2021.05.08  2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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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니스피플(The Tennis People)’이 추구하는 여러 담론 중의 하나는 ‘한국테니스의 프로화’ 다. 1981년부터 한국테니스의 프로화를 갈망하는 동호인, 선수, 지도자 등 각 계의 테니스인들이 주창해 왔고, 또 연관단체의 책임자들이 구체적인 추진계획까지 논의했던 ‘숙원사업’ 이었던 ‘프로화’가 수면아래로 가라앉아 요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80년대부터  한국테니스프로화가 거론되고 90년대초 조직위원회까지 꾸려져 출범을 앞뒀던 한국테니스프로화가 무산된 과정을 살펴봤다.

1984년 축구,야구, 농구, 배구 등 인기종목 활성화 움직임에 발맞춰 테니스도 실업연맹이 주축이 되어 세미프로화 추진 이야기가 거론됐다. 88년 11월 상금이 걸린 서키트 대회 창설을 추진했다. 89년들어 일신방직, 외환은행등이 기업 홍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 아마추어 운동팀을 해체되면서 실업테니스연맹이 자구책으로 프로화를 추진했다. 다만 선수층이 얇고 직장을 버리고 프로에 뛰어들 선수가 얼마나 있을 지 의구심을 가졌다. 현대, 대우, 호남정유 등이 프로에 뛰어들고 외국 선수들이 프로리그에 참여한다면 흥행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이때만해도 ATP나 WTA가 지금처럼 전세계 테니스대회를 관장하고 단일 스케줄로 활발하게 하지 못하던 때의 국내 테니스 프로화 생각이었다. 90년 말 테니스프로화 추진 계획이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한테니스협회 유영구 실무부회장은 테니스의 프로화는 세계적인 추세라고 보았다. 현대해상 김문일 감독이 프로추진연구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호주스타일을 국내에 도입하는 것을 검토했다. 대한테니스협회는 91년 12월 4일 이사회를 열어 프로위원회를 구성했다. 프로위원회가 외국선수초청대회, 외국광고주후원대회,우수국내선수국제대회 참가후원의 일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국내 테니스를 아마추어로 머물게 해서는 국제경쟁력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이때까지만해도 프로위원회는 대한항공, 현대차, 삼성생명, 제일제당, 유일공영, 제성양행, IBM, 벤츠, 말보로, 셀렘 등의 광고주와 협찬사 확보를 추진했다. 대회는 6개, 총 사업비는 12억원이 책정됐다. 이로 인해 한국테니스 프로화는 93년에 실현 되는 줄 알았다. 프로테니스위원회 이사장에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 이명박 전 현대건설 사장이 거론됐다. 하지만 이명박 전 현대건설 사장은 총선 출마로 이사장 자리를 고사했다. 게다가 프로위원회 김문일 위원장이 국민당 공천으로 총선 출마를 하게 됐다.

프로화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 선수들이 세계무대로 진입하기 위한 발판(platform)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스포츠 스타는 탄생(born) 했지만, 현재의 스포츠 스타는 만들어진다(made). 대한테니스협회를 비롯한 각급 단체들(organizations)과 기업들(sponsors), 그리고 스포츠마케팅사(ageny)와 미디어(media)들이 공조해야 한다. 특히 기업과 미디어는 만들어진 스타만 찾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통해 직접 키워낸다는 각오로 각자의 공적 역할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

 

   
 

 

   
 

 

 

   
 

 

   
 

 

   
 

 

   
 

 

   
 

 

   
 

 

   
 

 

   
 

 

   
 

 

   
 

 

   
 

 

   
 

 

   
 

 

박원식 기자 editor@tennispeople.kr

<저작권자 © 테니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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